귀신의 논문 리뷰/Cognitive Science of Religion

인지 종교학에 관련한 흔한 비판들에 대한 답변

˚-˚ 2021. 7. 19. 10:34

 

 

본 글은 "Common Criticisms of the Cognitive Science of Religion-Answered"를 한국어로 번역한 글이다. 정확한 서지정보는 다음과 같다.

 

Cohen, E., Lanman, J. A., Whitehouse, H., & McCauley, R. N. (2008). Common criticisms of the cognitive science of religion—answered. Bulletin of the Council of Societies for the Study of Religion37(4), 112-115.

 

아래의 url을 통해서 pdf 원문을 다운받을 수 있다.

 

https://static1.squarespace.com/static/530a3ca8e4b01885d317b273/t/536a5fc8e4b031c734d95d6d/1399480264635/common-criticisms-of-the-cognitive-science-of-religion-answered.pdf

 

번역 기간은 2021.07.13.~07.19.까지로 약 7일이 소요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나의 게으름과 영어에 대한 무관심이 빚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하루에 적어도 3 pages 정도씩 영문을 국문으로 번역해보려고 한다. 그럼 나중에 누가 번역서를 맡길 때도 크게 부담이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친구의 대학교 과제를 도와주면서 영어 아티클을 하나 통째로 번역한 적이 있었다. 그 경험에 이어서, 이번이 두 번째 번역이다. 솔직히 구글 translator가 더 매끄럽게 번역해주는 것 같다만.. 외국인이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쓰고 싶다면 이 정도 부끄러움은 견뎌야 한다고 본다. 

 

내 딴에는 지리 멸렬한 고생이라고 하지만, 모기 간 정도 되는 아주 작은 노력이, 누군가에게 소소한 길잡이가 되어주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인지 종교학에 관련한 흔한 비판들에 대한 답변

 

비록 인지 종교학(Cognitive Science of Religion) 연구 비판에 대한 철저한 리스트는 아니지만, 이것은 가장 공통적으로 반복되어 제기되어온 문제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반대 입장들에 간결하게 답변함으로써, 우리의 비평가들이 지적으로 더 결실을 맺는 영역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

 

1. 인지 종교학은 환원주의를 범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잠재적으로 과학에서 어떠한 새로운 이론의 진위를 평가하는 것과 새롭게 경험적으로 발견한 무언가를 해석하는 것과 연관된다. 이러한 원칙은 인류가 제기하는 모든 질문의 형태에 있어서 더도 없는 사실이지만, 새로운 증거는 과학에서보다 더 엄격하게 요구되는 곳이 없다. 탐구하는 사람이 이러한 원칙을 저버릴 때마다 그들은 통찰력 있는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장만 하게 된다.(Fodor, 1983) 이런 태도는 견제와 균형을 저해하고, 다른 연관된 질문들과의 통합하여 다룰 기회를 사라지게 한다.

   과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대개 환원주의자들이 아래에서 위로 확인한다고(상향적 사고방식, 옮긴이 주) 인식해왔다. 왜냐하면 더 많은 이론의 일반성과 정확성을 획득하기 위해, 또 더 많은 증거적 엄격성을 갖추려고 하기 때문이다. 증거적 엄격성이란 과학 분야에서 더 완성된 연구 프로그램이 더 낮은 분석 수준에서 실행됨이 전형적으로 누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념에 의해 동기 부여되지 않으며, 모범적인 성과들의 모범적인 실적에 의해서 추동된다. 현대 과학의 역사에서 어떤 발견의 체험도 우리가 높은 분석 수준에서 발견한 패턴을 설명하는 낮은 분석 수준의 메커니즘을 통한 탐색보다 효과적이지 않았다. 가령, 감수분열에 있어 DNA의 메커니즘의 측면에서 멘델이 발견한 유전 패턴이나, 반복되는 종교적 형태를 설명하기 위한 목적의 심리학적 메커니즘을 규명할 수 있는지 없는지와 같은 사안에 있어서 말이다. ‘환원주의는 언제나 악이다’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실수였다.

 

2. 인지 종교학은 단지 또 다른 (문화적으로 구축된/자민족중심적인/남성의/이성애적인/중산층의/개신교의/식민지 시대의/원하는 대로 삽입된) 이념일 뿐이다.

 

과학적 이론들이 단지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강경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자들인데 이들은 모든 진리는 사상가 공동체의 개념틀에 관계가 있는 상대적인 것으로 추정한다. 자신이 판 함정에 빠지는 위험은 별도로 하고 (만약 모든 진리 주장이 상대주의자들의 진리에 적용하는 데에도 연관이 있다면), 이러한 자세는 지적 무관심을 유도하며, 어떤 진지한 이론을 수립하는 시작조차 하지 못하게 만든다. 두 번째 부류의 학자들은 널리 알려진 라벨을 갖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라벨(power polemicists) 하나를 부여해보도록 하자. 강력한 논객들(power polemicists)은 진리를 얻으려는 노력이 이데올로기적 아젠다들에 의하여 영구적으로 오염되었으며, 불균형적인 힘의 투쟁(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백인과 흑인, 국가와 시민, 제국주의자와 식민지 주체 등)에 의해서 전복되었다고 주장한다. 강력한 논쟁주의(polemicism)가 수반하는 문제는 (확실히 과학은 정치가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그것의 일반적인 논지가 아니라, 그것의 방법론이다. 만일 어떠한 과학적 가설이 (가장 헐거운 비유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연합이나 이념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것은 가설을 폐기하는 충분한 원인으로서 강력한 논쟁가들에 의하여 다뤄질 것이다. 문화인류학자는 한때 붐비는 컨퍼런스에서 외침을 들었다. 그 외침은 다양한 종류의 이분법이 서구적 사고의 역사와 백인 남성 사상가들에게 지배되어온 전통에서 흔하게 발견되기 때문에, 이제는 이분법을 상정하는 행위를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에 이것이 명백히 터무니없다면, 인지 종교학(예를 들어, 특정한 종교성의 형태는 과거와 현재의 인간 사회에 널리 재현된다는 등의)의 특정한 가설은 주장될 것이며, 서구 기원의 모델(유럽 개신교 기독교 등)에 의해 영감을 받거나 그것이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일 것이며,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터무니있다면-역자 주), 다소 다르게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중론을 옮기기 위해서, 그에 대한 비판은 연관된 증거와 철저한 검토를 요구할 것이다. 단순하게 특정한 이론적 모델들과 그것들의 창시자들이 양성된 문화적 시스템들 사이의 유사성을 짚어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3. 인지 종교학은 특정 종교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작업과는 무관하다.

 

수많은 인지 종교학자들은 인지적 접근이 특정한 종교적 사고와 관습의 형태를 설명하는 데에 유용하다는 점을 발견해왔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계 브라질 사람들의 영성 소유에 관한 Cohen(2007)의 연구, 북미 근본주의자 침례교 신자들에 관한 Malley(2004)의 연구, 파푸아뉴기니 섬의 포미오 키벙 운동(Pomio Kivung movement)[1]에 관한 Whitehouse(1995, 2000, 2004)의 연구, 종교개혁에 관한 Vial(2004)의 연구, 미트라[2]를 향한 고대 로마 의식에 관한 Beck(2006)과 Martin(2004)의 연구 등이 있다. 본질적으로, 이러한 반대는 인지가 공백 상태에서 작동하거나, 인지 종교학자들은 인지가 공백 상태에서 작동한다고 여긴다는 점을 상정한다. 첫 번째 이유는 연구 대상에 대한 (거짓) 추정을 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 이유는 이러한 연구 대상에 접근하는 연구 수행자들에 대한 (거짓) 추정이다.

   인지 종교학은 인지적 과정들과 환경적 변인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측면에서, 재현의 패턴과 종교적 사고와 행동의 변이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그러한 설명은 문화가 필연적으로 인지 위에서 맴돌지 않는다는 입장을 수반하며, 그렇기에 인지는 문화로부터 어떻게든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회적·신체적 환경의 특정한 상태는 광범위하게 모든 인구와 대다수의 인류 역사에 걸쳐서 비슷하게 드러나며, 문화 교차적으로 유사한 방식의 인지를 활성화하고 조정한다. 환경의 일반적 특징에 의한 종교별 인지적 역량의 활성화와 조정의 측면에서 종교 내 반복되는 특징의 발생은 설명될 수 있다. 종교의 변화 패턴, 형태, 매우 지역적인 특징은 잠재적으로 같은 방법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 무수히 많고, 복잡하며, 가변적인 ‘뇌와 정신, 신체, 그리고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고려하기 시작함으로써 인지 종교학은 실험 가능한 가설들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가설들은 신 믿음, 영혼 소유 관습, 강한 자극의 의례, 복잡한 신학들, 더 많이 교차하는 문화들의 변하기 쉬운 발생과 특정한 형태들에 관한 것이다. (Barrett 2004, Boyer 2002, Cohen 2007, 그리고 Whitehous 2004를 보라) 특정한 종교의 몇몇 변하기 쉬운 특징들은 그러한 설명 방식을 순순히 따르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인간의 정신이 개개인 및 그들의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복잡한 방식들의 체계적인 검증 없이, 우리는 임의적인 독특성에 대한 예측 가능한 특징들을 실수로 오인할 위험성을 갖는다.

 

4. 인지 종교학은 사람들은 마치 감정 없는 컴퓨터처럼 다룬다.

 

감정은 최소한으로 반직관적인 행위자들에 대한 역학적 설명 안에서 최소한의 역할을 수행하는 반면에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는 없다), 감정은 확실히 인지 종교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예를 들어, Whitehouse(2004)와 McCauley and Lawson(2002)의 이론들은 종교 의례에 있어 감정적으로 자극하는 연상 기호와 결합한 영향을 강조한다. Atran(2002)은 어떠한 종교 의례가 누그러뜨릴 수 있는 불안감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례가 드러남에 있어서 필요로 하는 감정적 헌신을 강조한다. 반면에, Bering의 직관적이며 초자연적이고 사회적인 계약 이론은 초자연적 처벌의 두려움의 행동적 영향을 중시한다. (Bering 2006)

   감정과 함께한 인지 종교학의 매력은 결코 그것을 인지과학 중에서 독특한 분야로 만들지는 않는다. 수많은 학자들(Tooby and Cosmides 2000, Fessler and Haley 2003, Fiske 2002, and Damasio 1994)은 인간 인지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인지 종교학이 사람들은 “감정 없는 컴퓨터”로 다룬다는 비판은 인지 종교학과 함께 하는 유사한 인접 학문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이는 복잡성의 자연에 대한 빈곤한 견해를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 사고와 행동에 인지적 시각을 취하는 것은 우리의 뇌가 꽤 제한된 컴퓨터에 가깝게 닮아있다고 논증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컴퓨터는 우리와 친숙하며, 정신-뇌가 정보를 받아들이고, 정보에 대해 반응할 때 과잉 작동을 하며, 행동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컴퓨터적인 기관이라고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감정이 우리의 컴퓨터적인 건축물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과, 감정이 종교적 믿음과 행동에 관여한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 인지 종교학은 단지 사회-생물학/사회적 진화/전파론/기능론/등이 이미 유행이 지났고, 현존하지 않지만, 어떠한 요구로 인해 새로운 옷을 입은 ‘주의’일 뿐이다.

 

현대의 인지 종교학에서 추구되든 많은 가설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는 한편, 이러한 분야의 주요한 인물과 학교들은 사회과학의 역사 분과에 속한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만약에 어떤) “주의”가 있다면, 이것들은 거의 사회 이론의 역사에서 완전히 가치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주의”의 가설들은 모든 새로운 방향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완전히 실험하거나 개발된다는 사실이 지지되고 있다. 만약 사회과학이 지식의 축적된 양을 창출하려고 한다면, 그들에게는 이론들에 대해 배우면서 기초를 쌓고, 이전 세대가 발견한 것들을 전제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선행하는 지적 전통이 더 적은 이론에 기초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우리가 계속 옆길로 새면서 이미 완성된 여행의 방향을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 어디로도 빠르게 갈 수 없게 만든다.

 

6. 인지 종교학은 너무 제한적이다. (진화 심리학적인 메커니즘의 생성/억제 효과는 종교적 혁신과 전파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요인 중에서 단지 하나의 잘 설명해주는 요인일 뿐이다.)

 

모든 가치 있는 물음들은 피할 수 없이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증거를 얻는 방법들은 한정되어 있으며, 모든 이론들은 선택적이기 (그러므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모든 설명은 부분적이다. 철저한 과학적 설명과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설명의 충분함이나 타당함의 비교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항상 우리의 흥미와 그것들을 알리는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다.

   물론, 인지적 물음들은 역사적이고 민족지학적인 결과들을 조명하는 데에 이점이 있다. 진화 심리학적 메커니즘의 생성 혹은 억제하는 효과들은 단지 종교적 혁신과 전파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요인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인지 종교학은 여기에서 벗어나는 물음을 던지지 않으며, 단지 이 분야에서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경험적으로 책임감 있고 일반적인 제안을 추구한다.

 

7. 인지 종교학은 실수로 인과적 메커니즘의 측면에서 해석과 의미의 물음에 답하려고 시도한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관한 질문은 해석이나 설명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의 문제이다. 해석과 설명은 서로가 떼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설명은 데이터의 해석에 의존하며, 모든 해석은 다수의 설명 이론들의 뒷받침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Lawson and McCauley 1990과 Lanman 2007을 보라).

   일상 속 거의 모든 인간 행동의 해석들은 인간 행동의 내포된·인과적인 이론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마음 이론(theory-of-mind, TOM)으로 잘 알려진 문헌과 같이 말이다. 마음 이론은 인간의 행동을 믿음과 욕망이라는 내적 상태의 결과로 바라본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직관 이론으로, 어린이들의 문화 교차적으로 예측 가능한 발달 과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Baron and Cohen 1995와 Callaghan et al. 2005).

   구체적으로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 Marshall Sahins와 Gananath Obeyesekere는 1779년, 쿡 선장의 도착에 반응하여 실행된 하와이의 종교 의식에 관한 역사적 증거를 해석하기 위하여 시도하였다. (Sahlins 1995와 Obeyesekere 1997). 이러한 해석들은 인간 인지의 설명적 이론들에 의존한다. Sahlin은 그의 강력한 결정론인 “미토프락시스(mythopraxis)”[3]에 의존하여, 하와이 사람들이 쿡 선장을 다산의 신 로노(Lono)의 현현(顯顯)으로 해석하였다. 한편, Obeyesekere는 베버의 “현실적 합리성”이 상당히 변화한 버전의 이론에 기반하여, 하와이 사람들이 쿡을 강력하지만 전쟁에서 그들을 도와주는 매우 인간적일 가능성이 큰 사람으로 보았다(Lanman 2007).

   “해석의 문제”가 그 기저에 깔린 설명 이론을 고려하지 않고 어떻게든 적절하게 다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기본적인 상호의존성을 없애버린다.

 

8. 인지 종교학은 단지 일시적으로 나타난 유행이다.

 

인지적 시각은 종교학에서 신생 분과인 편에 속하지만, 이것을 단지 유행으로 치부하는 건 꽤 부정확한 판단이다. “유행”이나 “대유행”이라는 아이디어는 생각 없는 모방이나 순응의 함축을 일깨우고, 이는 우리가 인지 종교학자들에게 찾은 결과와 정확히 반대된다.

   인지 종교학자들 사이에는 매우 많은 논쟁이 있는데, 예를 들어, Whitehouse(2004)와 McCauley and Lawson(2002)이 의례 이론에 반대하는 것이나, 종교는 진화적 적응인지 아닌지에 대해 서로 겨루는 시각들이 있다(Boyer 2003, Bering 2006, 그리고 Bulbulia 2004를 보라). 게다가, 이러한 논쟁을 다루는 경험적으로 수행된 연구들이 있다(Malley and Barrett 2003과 Sosis and Bressler 2004). 순응과 모방 대신에, 우리는 논란을 찾았다. 유행 대신에, 우리는 경쟁하는 이론들의 경험적인 장점을 시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지속되는 시도를 찾았다. 이는 유행보다는 과학의 초기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인지 종교학자들이 제공하는 현재의 이론들은 그들의 이론이 제한적인 학문적 유통기한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유행들”이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 모든 과학적 이론들과 같이 이러한 이론들은 계속해서 연장되는 실험을 통해서 설명적인 패기를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전체적인 이야기를 즉시 빠르게 가지지 못할 것은 가상적으로 확실하다. 그러나 인지 종교학은 한 세트의 구체적인 이론들 그 이상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한 우리의 모든 지식을 활용하는 대규모적인 시도이다. 만약 그러한 대규모 사업이 “유행”으로서 일축된다면, 그것은 종교 연구와 모든 질문에 있어서 말 그대로 슬픈 날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각주>

 

[1] 파푸아뉴기니의 베이닝과 포미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관습처럼 행해진 천년왕국 운동이다. 이는 때때로 화물 신앙(cargo cult)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역자 주)

[2] 페르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빛과 진리의 신, 나중에는 태양의 신을 지칭함 (역자 주)

[3] 미토프락시스(mythopraxis)는 신화적 관습으로서, 인간 공동체의 집단적 의식에 내포된 형태에 따른, 인간 존재에 내재하는 경향이다. 이 기질은 서부 나이지리아의 포스트 독립 정치가의 첫 번째 세대에 의하여 정체화되었다. (참조: https://litcaf.com/mythopraxis/) (역자 주)

 

 

 

P. S. 오역 지적은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