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의 뉴스 리뷰/Religious Studies

흑인 교회의 슬픔: "그 흑인 교회"와의 작별

˚-˚ 2021. 8. 13. 18:21

 

 

안녕하세요. 귀신입니다. 앞으로 종교와 관련한 짧은 기사를 요약/번역해서 게시해볼까 합니다. 일단, 하루에 한 편 정도 포스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스케쥴에 따라 변동될 수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첫 번째 주제는 흑인 교회와 관련한 내용이네요. 요약/번역의 질은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최대한 정확을 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수상쩍다 싶으면 원문을 참조해서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Citation

 

Lofton, Kathryn. "BLACK CHURCH BLUES: PARTING WITH “THE BLACK CHURCH,” Religion Dispatches (July 3, 2009).

https://religiondispatches.org/black-church-blues-parting-with-the-black-church/

 

Black Church Blues: Parting with “The Black Church”

The Rev. Wright controversy begs the question: Has “The Black Church” outgrown its usefulness?

religiondispatches.org

 

 

어느 시점에, 우리는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는 것은 안다. 슬플 거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언젠가 곧, 희망하기론 최대한 빨리, 우리는 가버리도록 해야 한다. 아마도 공동 스크랩북(communal scrapbooking)을 만드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는 조각상을 만들도록 의뢰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더 소중한 종교를 정하는 행위가 곧 우리의 가장 파괴적인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오늘 흑인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대문자들은 선택적이다.  때때로 특히 최근데, 흑인 교회는 내던져지지 않은(정돈된) 이미지를 더욱 얻고 있다. 흑인교회는 표현적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대문자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최근의 *Wright 캠페인 논쟁 덕분에, 우리는 몇 가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먼저 저널리즘 및 블로그 세상에서 보도할 때의 공손함이다. 그리고 흑인 교회가 어떠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정기적인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 아마도 오랜 기간 동안 주시되어 왔다는 점, 유럽 교회와는 대조되는(이때, 부족한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이다) 종교 의례 패턴을 갖는다는 점 등이다. 또한, 흑인 교회는 억압으로부터 드러났으며, 형태가 있지만 보이지 않게 지내왔으며, 화해적이면서도 급진적이고, 평등주의적이면서 카리스마적이다. 최근에 우리가 알게된 것은 흑인 교회를 상징하는 t(The), b(Black), c(Church)가 황홀경에 빠진 예배 의례를 설명하는 기호가 되었다는 것이며, 그뿐 아니라 정치적 행동주의나 (정치적) 색깔을 가진 기독교인들 사이의 사회적 단체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Jeremiah Wright Controversy: 한때 미국에서 전국적 관심을 일으킨 사건. Jeremiah Wright는 원래 버락 오바마 후보 진영의 목사였다. 하지만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중, 정부에 대해 일방적으로 규탄하자, 여러 언론이 이를 비판하였다. 오바마도 나중에는 Wright 목사와 선을 그으면서, 노골적인 발언에 대해 철회하기를 촉구했다. (Wikipedia)

 

미디어(와 남자들의 미디어)는 이러한 라벨(표기)의 영구성만 탓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 종교의 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흑인과 백인, 개신교도와 비개신교도, 세속적과 교파적 등) 그것의 의미와 보충 설명을 수십 년동안 아끼지 않았다. 이는 효과적으로 통합된 영적인 실재를 나타낸다고 믿어졌다. 특정한 영적인 자격, 특정한 고통의 역사를 공유함, 재판이나 인내 그리고 승리에 대한 공유된 수사법 등을 풍부하게 하면서 말이다. 실제로, "흑인 교회"는 드물게 사용되는 어구이며, 이 용어는 종파적 공간 혹은 학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어휘이다. 문화적 관계항이 추정하는 외형은 익숙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 외에는 탓할 사람이 없다. 이것은 이력서와 테뉴어를 의도하는 부풀려진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과 그때의) 학자들에게 흑인의 기관으로서 흑인 교회는 그들 자신이 주체적으로 정의하고 지지되어 왔다. 흑인 자유주의 학자들은 흑인 교회의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흑인 교회가 노예 해방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경제적 박탈과 식민지화의 상태를 제거하는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흑인 교회는 백인 원시주의자(근본주의자)들의  산물에 저항하고자 했으며, 원시와 민족에 대해 정교하고 체계적인 대안을 제공하였다는 의미다. 흑인 교회는 외적인 자유를 형성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외적인 구조를 제공해주었다. 흑인 교회는 적어도 그들 자신을 만드는 발판이 되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길고 통합적인 분류의 역사(백인과 흑인 교회)를 재구조화시켰고, 모든 사람을 더러운 인종적 학대와 제국주의적 압력으로부터 구원할 이상적인 사회적 개입을 고안하였다. 정부의 실패,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자 및 (비)시민들을 향한 학대와 착취로 점철된 오랜 역사에 대하여, 흑인 교회는 대항하였고 만들어졌다. 흑인 교회는 리바이어던으로 상정된 것에 반하는 상상력이었다.

 

몇몇 방식은 혁명적인 가치를 전달하는 용어를 탈구축하기 위해서 위해를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이 일대기적인 완전함에 투자하기를 시도할 때 (대통령 후보나 그들의 성직자들, 성직자들의 정치적 입장, 교파의 역사에 관한 경우, 또는 대통령 선거에 미치는 다양한 요소-성직자들, 지역들, 교파들-을 설명하기를 시도할 때) 흑인 교회는 고속도로 위에 있는 '해변가의 고래(beached whale)*'와도 같이 행동한다. 흑인 교회는 의미가 퇴색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단일체적이며 매우 모호하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꼼꼼한 기록 역사가, 전문가, 혹은 잘 아는 결정을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일반적인 유권자들에게 말이다 (비록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또한, 묘사되는 바로 그 기관(흑인 교회)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석적인 예측 불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관점을 고정적이고, 보편적이며, 필수적으로 유형적이게 한다. 반면에 백인들에게는 변화 가능성과 다양성이 허용되지만 말이다. 흑인 교회와 같은 개념들은 본질적으로 개별화에 저항적이다. 백인의 개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하고 퇴보하며, 복잡하게 하며, 숙고해왔지만, 흑인 교회의 후원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흑인 교회의 구성원이라면 얼마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 영원한 기술어들(descriptors; 급진주의적 이념들-번역자 주)에 빠져버렸다. 

 

*Beached Whale Syndrome(B.W.S.): 어떤 주어진 과제가 너무 어렵다고 판단될 때, 오히려 더 늦장을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현상. 바닥에 누워서 몸을 구르거나 흐느껴 울거나 신음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마치 해변가의 고래와도 같이 말이다. 혹은 공동체 대다수의 사람들이 게으를 때, 덜 게으른 사람도 늑장을 피우게 되는 현상을 일컬음. (Urbandictionary) 

 

대체로 그렇게 관행적으로 인정되는 용어(흑인 교회)는 특히 다루기가 힘들다. 만약 누군가가 정치적 계산을 공부하거나, 종교적 반대를 하기 시작할 때 말이다. 반면에, (상상된) 백인 문화 안에서, 제도적 권위에 반대하는 개인들은 추앙을 받으며, (상상된) 흑인 공동체 안에서 기존에 만들어진 관례를 감히 부정하는 사람들은 백인 진보층과 온건한 흑인층에게 반역자로 여겨지게 된다. 진보 백인층과 온건한 흑인층은 인종적 화해에 덧붙여 제도적인 성공을 요구한다. 우리가 모두 드러나는 곳에서 우리는 질퍽질퍽하고 일관성이 없는 엉망진창인 존재임을 알지만; 우리는 교회에서 인간, 나아가 국제적 사회로까지 상향하는 (혹은 하향하는) 명확한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실천가들이 강력한 개성과 함께 (마치 눈송이처럼 똑같이 닮은 것은 없이) 행동한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단정적인 손팻말을 재분류하지 않을 수 없다. <The History of the Negro* Church(1921)>의 저자인 Carter G. Woodson도 아마, 지금이라면, 산만하게 퍼져있는 흑인 기독교 정체성을 통합하기 위하여 몇몇 다른 건축적인 은유를 제안하였을 것이다. 확실히, 모든 조사 분야들은 추상적인 용어들(e.g. 흑인 교회, 기독교 우파, 뉴에이지)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흑인 교회를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요약하기에, 또 낭만적인 형용사로 사용하기에 대단히 민감하게 보인다. 분류의 용어와 이데올로기적 기도로서의 흑인 교회는 정확하기보다는 추상적이다.

 

*현대에 Negro라는 용어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거나, 혹은 옛 인명이나 지명 등 고유명사에서 주로 나타남.  

 

얼마나 이상하든, 훌륭하든, 복합적이든에 상관없이 버락 오바마와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는 그들 자신을 그들의 (개인적이고 학문적이며 지적이고 종교적인) 역사 기술의 그림자로부터 정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들에게 집중된 스포트라이트의 이야기에 의해 그들이 널리 알리는 단체의 생산물이 되기에 쉬워졌다(즉, 유명해졌다는 뜻-역자 주). 이 사건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더 이상 그들로부터 참을 수 없다는 내러티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집착에 굶주린 대중은 그에 못지 않게 참을 수 있다. 어떤 상징적인 흑인 인물이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교회보다 더 다수의 한 사람, 대중의 한 사람이 되었던 적이 있는가?(교회라는 외집단의 한계를 넘었던 적이 있는가?-역자 주) 라이트(Wright)의 극단적 주장들은 비교적으로 꼼꼼한 기준과는 동떨어져 발화되었다. 그가 시도한 기준은, 어떠한 작은 헛됨도 없이, 재정의되어야 한다. 극단들(wings)을 재정립하는 일은 흑인 교회를 약화시키거나, 별볼일 없게 만들거나, 어설픈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흑인 교회의 의미를 조장하는 일은 그것의 역사를 바꾸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라토리엄(moratorium; (공적 합의에 의한) 활동 중단, 일시적 정지-Naver dictionary-역자 주)에 맞서 싸우자. 단어의 장례식에 대항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러한 일이 실현되는 곳에서 흑인 교회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원문은 "더 많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표현했음; 참조: "I promise: there will be more from whence it came") 약속한다.

 

[기술적 카테고리로서의 흑인 교회의 역사들을 더 알고 싶다면, Curtis J. Evans, The Burden of Black Religion (Oxford, 2008) and Laurie Maffly-Kipp, “Mapping the World, Mapping the Race: The Negro Race History, 1874-1915,” Church History 64:4 (December 1995), pp. 610-626.를 참조하라]

 

 

캐서린 로픈(Kathryn Lofton)은 예일대학교 종교학, 미국학, 역사학과 신학대학원의 교수이다. 그녀는 현재 Diversity and Faculty Development의 부학장으로, 종교학과 학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